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읽는 사람’에서 ‘넘기는 사람’으로 — 깊은 읽기의 종말

by samny 2025. 11. 1.

스크롤이 사고를 대체하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읽고’ 있는가. 오늘은 깊은 읽기에 대해서 글을 써보겠습니다.

‘읽는 사람’에서 ‘넘기는 사람’으로 — 깊은 읽기의 종말
‘읽는 사람’에서 ‘넘기는 사람’으로 — 깊은 읽기의 종말

 

우리는 언제부터 긴 글을 읽기 어려워졌을까

책을 펼쳐 한 문장씩 따라가던 시절이 있었다.
한 문단의 의미를 곱씹으며,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던 느린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읽기는 다르다.
손가락은 스크롤을 내리느라 바쁘고, 시선은 몇 초마다 다른 화면으로 옮겨간다.
기사는 요약본으로 대체되고, 영상 자막은 읽기도 전에 지나간다.
우리는 여전히 정보를 ‘보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읽는 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변화는 단순히 생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뇌 구조 자체가 디지털 읽기 환경에 맞게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술문화평론가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는
그의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은 우리가 읽고 생각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에 따르면, 인터넷은 ‘깊이 읽기’보다
‘빠르게 훑기’를 강화하는 환경을 만든다.
즉, 디지털 시대의 뇌는 깊이 사고를 위한 회로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단순한 추상적 경고가 아님은 여러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노르웨이 스테이브랑대의 연구에 따르면,
종이책으로 읽은 학생들이 전자책으로 읽은 학생보다
내용 이해와 기억력에서 월등히 높은 점수를 보였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디지털 화면은 주의를 지속시키지 못한다.
링크, 알림, 광고, 추천 콘텐츠가 끊임없이 뇌를 자극하며,
독자는 한 문단에 오래 머무는 능력을 잃는다.
이제 우리의 읽기는 ‘생각하기 위한 읽기’가 아니라
‘다음 것을 찾기 위한 읽기’가 되었다.

 

디지털 읽기가 바꿔놓은 뇌의 회로

인간의 뇌는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이를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 한다.
즉,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소비하느냐에 따라
뇌의 연결 구조와 사고 패턴이 바뀐다.
디지털 읽기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터넷과 SNS의 정보 구조는 “깊은 몰입보다는 빠른 반응”을 유도한다.
한 화면에 수많은 정보가 동시에 존재하고,
사용자는 단 몇 초 안에 수십 번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 결과 뇌는 ‘집중’보다 ‘전환’을 기본 모드로 학습한다.
심리학자 클리퍼드 내스(Clifford Nass)는 이를 “주의력 분절(attentional fragmentation)”이라 불렀다.
즉, 우리의 주의력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계속 쪼개지고 흩어진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는 “지속적 집중 능력의 약화”다.
한때 30분 이상 몰입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이
지금은 5분만 지나도 화면을 바꾸고 싶어진다.
이것은 의지 부족이 아니라,
뇌가 이미 ‘짧은 자극’에 맞춰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카는 이를 “피상적 사고의 강화”라고 표현했다.
많은 정보를 빠르게 넘기며,
내용을 ‘아는 듯한’ 착각에 머무는 상태다.

이러한 읽기 방식은 사고의 깊이뿐 아니라 감정의 폭에도 영향을 미친다.
깊은 읽기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천천히 따라가며 공감한다.
그러나 디지털 읽기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된다.
문장은 짧고, 감정은 요약되고,
결국 우리는 ‘이해하는 인간’이 아니라 ‘반응하는 인간’으로 변한다.

 

사유를 되찾는 법 — 깊이 읽기의 회복 실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읽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독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 능력을 회복하는 일과 직결된다.
다음의 세 가지 실험은 작지만 실제로 효과가 입증된 방법들이다.

첫째, ‘읽는 시간’을 정해라.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정해 오직 읽기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핸드폰을 멀리 두고, 알림을 끈 상태에서
15분이라도 종이책을 읽는 습관을 들여보자.
이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뇌의 집중 회로를 다시 훈련하는 행위다.
처음에는 어려워도 며칠 지나면
뇌가 ‘한 문장에 머무는 법’을 서서히 기억한다.

둘째, ‘느리게 읽기’를 시도하라.
속독보다 정독, 요약보다 곱씹기가 필요하다.
한 문장을 읽고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거나,
밑줄을 긋고 여백에 생각을 적는 것도 좋다.
읽기를 다시 ‘생각의 과정’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이 느린 읽기 속에서 정보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지식이 되고 통찰이 된다.

셋째, ‘연결 읽기’를 실천하라.
하나의 책이나 글을 읽을 때,
그 내용이 내 경험 혹은 다른 주제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철학서를 읽으며 사회문제를 떠올리고,
문학 작품을 통해 나의 감정을 탐색하는 식이다.
이렇게 연결된 사고가 깊은 읽기의 본질이다.
읽기는 결국 ‘타인의 생각을 빌려 나 자신을 확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읽기를 다시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엇을 얼마나 읽었는지가 아니라,
그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얼마나 사유했는지가 중요하다.
책 한 권을 완독하는 대신,
한 문장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보자.
그 느림 속에서 사고의 근육이 다시 자란다.

 

맺음말 — 깊이 읽기의 부활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우리가 긴 글을 읽기 어려워하는 것은 단지 바빠서가 아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우리의 뇌가 그 속도에 맞춰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가 반드시 사고의 퇴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를 사용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깊이 읽기는 시대의 속도에 저항하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다.
한 문장에 머물며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느리게 사고하고,
다시 느끼며,
다시 인간답게 존재한다.

스크롤은 끝나지 않지만,
책의 한 페이지는 끝이 있다.
그 유한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유의 깊이를 회복한다.